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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부르는 노래 - 장연호 展







● 우리는 혼자 부르는 노래와도 같아서

임현영(독립 큐레이터)


0. 노래를 듣는 것과 부르는 것. 둘 중 당신은 무엇을 더 선호하는가? 굳이 하나만 꼽으라고 하지는 않겠다. 누군가는 이 두 행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리기까지, 음악이 귀로 들어와 입으로 다시 빠져나가기까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시간의 낙차를 상상하게 하기 위함이다. 다수의 사람에게 이 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음을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에게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더디게 일어나는 소화와도 같을 것이다. 1.

《혼자서 부르는 노래》는 이 지난한 ‘소화’에 방점을 둔다. 낱개의 작품이 언어와 몸, 음악이 만나 노래로 발전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체현한다면, 작품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전시는 그것을 길게 늘어뜨려 보여준다. 노래가 자신을 표현하는 말하기의 연장선에 있다는 한 가설로 미루어보았을 때,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오랜 시간 내면에 고여 있던 감정을 표출하는 행위이자 ‘소리를 내는 주체’로서 자신을 외부로 노출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부르는 것은 차치하고 듣는 행위만 떠올리더라도, 음악 감상에 수반되는 여러 반응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단순히 쾌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 정화, 혹은 공감을 통한 인식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 작용은 ‘카타르시스(katharsis)’1)라는 이론으로 주로 설명되곤 한다. 다만, 전시가 살피고자 하는 것은 비극이 유발한 연민, 공포에 한정된 카타르시스가 아닌 ‘삶을 바꾸라는 부름이자 호소’로서의 카타르시스이다. 루카치(Lukács)는 인간의 카타르시스가 예술로부터 연유되어 삶으로 흘러온 것이 아니라 삶에서 비롯되어 예술로 흘러온 것이라고 주장한다.2) 곧, 그것은 미적으로 반영된 일상적 현실이며, 이를 다시 수용한 인간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요인이다. 전시의 구심점을 차지하는 것은 이러한 파급으로서의 카타르시스이며, 작가는 이해가 아닌 체험으로써 그 기능을 실현한다. 본문은 전시를 크게 세 파트로 나누어 살펴본다. ‘누군가로부터 오는 노래’, ‘여럿이 부르는 노래’, ‘혼자서 부르는 노래’가 이에 해당하며, 글은 노래의 흐름을 따라가듯 한 단계에서 그다음으로 넘어가는 순차적인 과정을 그린다. 타인의 음성이 나에게 닿고, 그것이 내부에서 공명을 일으킨 후 더 큰 파장으로 몸을 빠져나가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 여정. 전시는 이 긴 ‘호흡’을 노래한다. 1) 정화(purification)나 배설(purgation)을 뜻하는 카타르시스(catharsis)는 전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a)에서 비극을 감상하는 사람의 감정에 나타나는 작용으로써 감정의 승화를 통해 인격을 합리적이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아리스토텔레스, 김한식 역, 『시학』,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p.133 참조.) 2) 게오르그 루카치, 임홍배 역, 『루카치 미학 제 3권』, (Aesthetics, 1963), 미술문화, 2002, p.19.


▲ 장연호, Lullaby 2021-2022, 5-Channel Video, 12'50''

2.1. 누군가로부터 오는 노래 5채널 영상설치 작업 <Lullaby>(2021-2022)는 자장가를 소재로 위로와 회복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듣게 되는 노래라고도 할 수 있는 자장가는 송신자와 수신자의 밀접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완성도 높은 다른 음악보다도 부모를 비롯한 가까운 가족이 불러주는 자장가를 가장 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본연의 정서와 가장 친숙한 음향 체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장가는 두 인격체 사이를 잇는 가장 원초적인 문화적 매개체로써 부르는 이와 듣는 이를 하나의 공통된 감각으로 묶는다. 이 정서적 통합에 의해 어떤 이는 음성만으로 타인에게 아주 특별한 인물이 된다.

▲ 장연호, Lullaby 2021-2022, 5-Channel Video, 12'50''

<Lullaby> 속 인물들은 저마다 자장가를 부르거나 듣고 있다. 그 중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자장가를 부르다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성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이 비디오 초상 시리즈의 메시지를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리는 소리 없는 화면을 경유하여 여성의 눈물 젖은 목소리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노래하는 동시에 울 수 있다는 것은 이들이 동일한 신체적 경로를 공유함을 의미한다. 시각에만 의지해 노래 부르는 행위와 우는 행위를 판별한다고 했을 때, 이들을 엄밀히 구분할 수 있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도 노래와 울음 간의 유사성을 뒷받침한다. 이때, 노래와 울음을 함께 유발하는 ‘정서적 격동’, 즉 정동(affect)3)은 카타르시스의 결과물이 아니라 역으로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주체로 작용한다. 여성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아이에게로, 최종적으로는 관람자에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정동은 부단히 변화하고 굴절되며 퍼져나간다. 이 역동성은 아이와 여성을 공존시키는 힘이면서도 후자가 자신의 실존을 재확인하는 힘이기도 하다. 잠이라는 불확실한 세계를 앞에 둔 아이가 자장가를 들으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듯, 화면 속 두 인물에게 자장가란 강력한 유대를 형성하여 삶의 어두운 면들을 함께 이겨내고 이들이 꿈꾸는 세계로 도달하게 만드는 동력과도 같다. 작가는 서사를 배제하고 오로지 이미지의 움직임만으로 영상을 구성함으로써 관람자가 인물의 표정과 행동에 깊숙이 몰입해 그것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 폐쇄된 화면 속에서 신체의 반동과 토닥이는 제스처, 입술의 미묘한 움직임은 반복적으로 구사되고, 이 모든 행동은 지극히 느린 흐름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우리의 의식을 서서히 강타한다. 3) 들뢰즈는 정동을 한 완전성(perfection)에서 또 다른 완전성을 가진 관념으로의 이행으로 보았다. 카타르시스는 정동의 이행 과정에서 의식이 확장되거나 변화할 때 경험된다. 우리가 대상을 지각하며 감정과 신체의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정서적 격동을 겪을 때 카타르시스의 순간과 마주한다고 할 수 있다.(김민지. (2020). 카타르시스와 정동의 시론적(試論的) 고찰. 문학치료연구, 55(0), p.205-227 참조.)

2.2 여럿이 부르는 노래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2020-2021)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2018)는 민속놀이에서 불리던 노래를 카타르시스의 유희적인 측면으로 풀어낸다. 노래가 놀이를 통해 이어지는 과정은 부정적인 감정을 놀이와 비슷한 ‘가벼움’으로 전환하는, 감정의 균형을 맞추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점에서 정동의 ‘이행’4)에 비견될 수 있다. 영상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그리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단순한 가락을 음성만으로 재생한다. 암송하듯 가사를 담담히 뱉어내는 목소리는 음향효과로 인해 증폭되고, 관람자들은 이 소리의 물성을 감각한다.

▲ 장연호,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2021, VR, Installation, Sound, 04'35''

한편, 두 작업에는 모두 작가의 멀티 페르소나가 등장한다. 서로를 반사하는 작가의 자화상과도 같은 이들은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주체 및 그가 가지고 있는 다중의 무의식적 감각을 표상하는 것이다. 노래가 여러 페르소나를 거치는 동안 카타르시스가 문제 삼는 감정들은 끊임없이 변형된다. 이는 페르소나들이 서로(의 상처)에게 열려 있는 비고정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먼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의 페르소나들은 의식까지 도달하지 못한 정동, 혹은 억눌린 트라우마를 형상화한다. 저절로 움직이고는 있으나 각각의 신체는 여전히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혼자만의 몸짓은 사색의 영역에 머문다. 시선은 허공을 응시한 채 서로 교차하지 않는다. 이는 아직은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주체와 그의 자아 안을 맴돌며 재생산되는 슬픔을 나타낸다.


▲ 장연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2018, Single-Channel Video, Sound, 02'15''

반대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페르소나들은 그와 대조적으로 서로 끊임없이 시선을 마주치고 몸을 움직인다. 이 동적인 교류의 양태는 놀이의 규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술래는 노래에 맞춰 뒤를 돌아보고, 움직이는 사람을 잡아내며, 최종적으로 그의 역할을 다른 이에게 넘긴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동작과 일정한 간격으로 교체되는 술래는 그 어떤 인물도 그의 현재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각 페르소나들은 순서를 바꿔가며 서로의 감정상태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노래라는 기반 위에서 느슨한 결속을 이룬다. 4) 루카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과도한 감정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맞춰지는 건강한 균형이라고 이해한다. 이는 한 감정에서 다른 감정으로의 변화, 즉 운동성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연속적 변이를 통한 존재의 확장을 의미하는 정동의 이행과 맞물린다.(연효숙. (2015). 들뢰즈에서 정동의 논리와 공명의 잠재력. 시대와 철학, 26(4), p.187-217 참조.)


▲ 장연호, 혼자서 부르는 노래, 2022 Single-Channel Video, Koraoke Machine Installation, Sound

3. 혼자서 부르는 노래 전시의 끝에 다다라 작가는 관람자 개인이 구체적으로 경험한 감각의 변환을 신체의 바깥으로 끌어내기를 제안한다. 앞서 타인이나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외부에서 흘러온 음성이 주체의 내부에서 공명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혼자서 부르는 노래>(2022)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의 보편성을 고찰하게 만든다. 이는 프레임 안에 고착된 타인의 퍼포먼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몸의 수행을 통해 직접적으로 가능해진다. 작품에 독특한 부분이 있다면 노래방 기계가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한 번은 사용해보았을, 나아가 익숙함마저 자아내는 이 물건은 용도 그대로 관람자의 ‘노래’를 위해 설치되었다. 관람자에 의해 작동되어야만 하는 이 장치는 주체 없이는 노래가 생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비어있는 주체의 자리에 관람자 자신을 대입할 것을 유도한다. 그러나 노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작가가 의도한 퍼포먼스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일 노래를 부르지 않기로 한 경우, 중요한 것은 ‘무엇이 우리의 참여를 가로막고 있는지’를 인지하는 것이다. 이는 노래의 과정에 숨겨진 비가시적이고 복잡한 층위를 가늠하는 일과 동일하다. 이처럼 <혼자서 부르는 노래>의 결말은 전적으로 열려있다. 그러나 합의를 강제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지닌 노래에 대한 원초적인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작가는 관람자가 ‘노래를 부를지 말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도리어 이러한 욕망을 직시하게 한다. ‘혼자서 부르는 노래’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전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작가는 작업을 하고 전시를 꾸리는 모든 과정이 혼자 부르는 노래와도 같다고 말한다. 혼자 노래할 때 듣는 이를 의식하거나 굳이 누가 따라 불러주기를 기대하지는 않듯이, 다른 이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나간다. 그에게서 ‘나’의 모습을 본다. 우리의 삶은 혼자 부르는 노래와 같아서 시공에 새겨지는 동시에 지워져 버리고 말지만, 그럼에도 노래가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순진해 보여도 한 번쯤은 믿고 싶다. 누군가 잘 들리지도 않는 서툰 나의 흥얼거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라고. 이것이 구원이 될 수는 없어도, 그를 다시 노래하게 만들고 있다고.

▲ 장연호, 혼자서 부르는 노래, 2022 Single-Channel Video, Koraoke Machine Installation,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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