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형으로 확장하는 미래> 김지연 (미술비평)
- Yeonho Jang
- 4일 전
- 6분 분량
작가의 삶과 작업을 떼어 놓고 바라볼 수 있을까? 물론 어떤 작품은 작가의 삶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작품의 기초가 된 사유와 시선은 여전히 작가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작가의 경험과 기억과 몸의 감각은 작업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작품 속에 스민다. 때문에, 작가 개인의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작업의 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장연호의 작업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초기 작업은 자신의 몸을 매체로 삼아 스스로의 정체성과 개인으로부터 비롯된 관계를 다룬다. 이는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독일에서 작업하던 시절, 자신의 얼굴을 문질러 이목구비를 지우는 영상 작품 <사라지다>(2013)가 대표적이다. 여성이자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몸을 작품 속에 투영하며 존재에 대한 고민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장연호의 작업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애나 멘디에타, 차학경과 같은 여성 작가들의 계보를 잇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의 시선은 점점 외부로 향했다. 과거의 작품도 관계나 사회적 담론을 다루었지만, 어디까지나 중심은 작가 자신이었다. 그러나 2015년의 영상 작품 <마지막 밤>에서부터는 사회적 시선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스크린 속 작가는 어두운 방에 누워 있고 또 다른 작가의 모습들이 등장해 서로 몸을 맞댄다. 개인적 서사와 사회적 슬픔이 맞닿는 순간이었다. 세월호로 표상되는 사회적 재난 앞에서 그는 더이상 '자기 자신'만을 이야기할 수 없었고, 예술의 쓸모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호명과 연결
<마지막 밤>으로부터 정확히 10년이 흐른 지금, 장연호가 선보인 신작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흐려지고 타인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전수자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우리에게 이름>은 그들이 심방이 된 과정과 직업관, 개인적인 삶의 서사, 제주의 자연과 여성의 이야기가 굿을 행하는 장면들과 교차한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에는 거친 제주 바다 앞에 우뚝 선 심방의 모습이 보인다.
한편 <40 forty 불혹>에서는 작가의 40살을 맞은 여섯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레지던시 입주를 위해 고향인 전주를 찾은 장연호는 자신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촬영한 필름에서 꿈을 이야기하는 같은 반 친구들의 얼굴을 발견한다. 수소문하여 찾은 동창들은 20여 년 전과 같기도 다르기도 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19살 때의 꿈과 40살이 된 현재의 삶을 담백하게 이야기하며, 같은 시대와 지역을 통과한 여성의 삶이 이토록 다양할 수 있다는 진실을 드러낸다.
장연호는 전작들에서 특정한 주제를 보여주기 위해 연극적인 미장센을 드러내는 데에 힘썼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자연스레 보여주는 방식을 채택한다. 강렬한 미장센 대신 서사와 언어가 중심이 되는 형식으로 변화했고 타인의 얼굴이 작품의 중심을 차지한다. 작가의 몸이 화면에서 사라진 대신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았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관찰자로서의 작가가 거기 있다. 우리는 작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보는 것을 본다. 이러한 형식의 변화는 이번 두 신작이 전작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이다.

<우리에게 이름>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고 심지어 차별당했던 제주 심방들의 이야기를, <40 forty 불혹>은 사회가 마흔 살의 여성에게 갖는 전형적인 편견을 걷어내고 진짜 이야기를 꺼낸다. <마지막 밤>에서 시작하여 방향이 바뀐 시선은 이제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구체적 타인에게 닿는다. 장연호가 전작에서 자신의 정체성 찾기를 지속했던 이유가 정형화된 사회의 시선에 가려진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는 이제 시선을 외부로 돌려 타인의 이름을 부른다.
<40 forty 불혹>은 등장인물들의 고백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삶을 연결하고, 떨어져 있던 친구들의 관계를 다시 연결한다. 또한 이들의 이야기는 작품을 통해 동시대의 보편성을 획득하며, 화면 밖 관객에게 닿는다. 작품 안팎의 관계망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종횡으로 우리를 연결짓는다. 한편 <우리에게 이름>은 연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칠머리당 영등굿은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과 인간의 물리적 삶을 연결하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며, 지역 커뮤니티를 결속하게 만든다. 이 모든 연결의 매개가 되는 것이 심방들이다. 또한 이들은 전통문화로서의 굿을 전수하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이렇게 두 신작은 각각 다른 주제를 다루지만, 잊혀진 이름을 부르고 단절된 관계를 이음으로써 작품 밖까지 이어지는 서사를 구축하려 한다는 형식적 공통점을 지닌다.

연결과 치유
이탈리아의 구술 역사가 알레산드로 포르텔리(Alessandro Portelli, b.1942)에 따르면 구술사는 단순한 증언이나 기록이 아니다. 구술사를 통해 말하는 이와 듣는 이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형성된다. 신작의 중심을 이루는 장연호의 인터뷰 역시 단순히 현실의 재구성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삶을 드러내고 관계를 형성하며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는 이제 개인의 삶을 넘어 공동체적 의미와 연결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작가 내부의 성장과 고민은 물론 레지던시 입주에 따른 귀향, 그리고 동료 예술가들과의 교류라는 환경적 변화도 영향을 미쳤을 테다.
예술은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개인적 표현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예술가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를 위치 짓고, 그것이 작업의 흐름 또한 결정한다. 이는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b.1930)가 말하는 '예술적 장(Artistic Field)' 개념과 연결지을 수 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예술 또한 사회의 다른 '장'들과 맞물려 있으며, 그 안에 분포한 자본을 활용하는 정도에 따라 개인의 위치가 결정된다. 그렇게 형성된 ‘장’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다만 예술은 다른 생산물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예술가는 그러한 생산물, 즉 자신의 작업물에 스스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 삶의 모양은 모두 달라서 어떤 누구도 타인의 삶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게 예술가일지라도. 그러나 어떤 삶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언제든 나의 외부, 타인의 삶의 모양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누군가 세상에 존재하는 공간을 조금이라도 넓혀주는 일이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한다면 그러한 과정을 통해 타인도 나의 삶을 상상해줄 수 있다. 모두가 손에 쥔 유일한 삶은 상호작용 속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40 forty 불혹>은 특정 지역과 시대, 연령의 여성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 속 이야기를 들으며 깨닫는 것은 누구의 삶도 다르면서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각자의 굴곡을 넘으며 삶을 이어간다. <우리에게 이름> 또한 마찬가지다. 비범하고 특별한 존재, 시대에 따라 천하게 여겨지기도 했던 심방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희노애락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이자 사회의 일원, 사명감을 가진 직업인이 보인다. 작가가 호명한 작품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작가라는 필터를 통해 관객에게 닿으면, 멀리 있던 삶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보편성을 획득한다. 작품을 경유한 관객은 이제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본다.
이렇게 한 사람의 주관적 경험이 다른 사람의 주관적 경험에 영향을 미칠 때, 이야기는 '상호 주관성'을 획득하며 연대의 씨앗이 된다.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b.1965)가 말한 '관계 미학'이 생성하려는 순간이다. 이렇게 서로의 삶이 거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등을 토닥이는 일을 통해 장연호는 예술에서 가능한 치유의 효과를 노린다. 그가 추구하는 예술의 쓸모다.

치유와 회귀
자기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작품은 이제 멀리 원을 그리며 타인의 삶을 포섭한다. 장연호가 독일에 머무는 동안 이방인이자 젊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지속했던 것은 스스로 바로 설 자리를 찾고 싶어서였다.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고 해서 그의 질문이 사라지진 않는다. 천편일률적 시선에 가려진 유일한 삶의 모양들을 찾아내는 작업 과정은, 작가가 스스로 단단히 세워온 삶으로부터 지금 속한 사회와 관계 맺으며 생겨난 질문의 답을 찾는 방식이다. 즉, 외부를 탐색하는 작업은 작가 자신의 유일한 삶을 더욱 선명하게 발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에 발표한 두 신작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작품 <혼자 추는 춤>(2024)은 이러한 순환의 키를 쥐고 있다. 작가가 타인의 삶을 기록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탐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장연호는 칠머리당 영등굿을 촬영하면서, 굿의 마지막 순간에 심방은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일어나 다 같이 흥겹게 춤추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이 장면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굿이 우리 삶과 동떨어진 신비로운 것이라기보다 오늘을 사는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의식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춤추는 장면을 모티브로 하여, 작가 자신의 모습이 여럿 등장해 함께 춤추는 장면을 연출했다. 타인의 이야기를 기록하던 작가는 카메라 앵글 밖의 자신을 재발견하고 다시 무대 위로 불러낸다. 이 ‘혼자 추는 춤’은 ‘함께 추는 춤’의 모방이 아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유해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 몸의 움직임으로 전환된 순간이었다. 춤추는 작가의 얼굴들이 과거와 달리 평화롭고 안정된 미소를 짓는 것은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테다.

회귀와 미래
장연호의 작품 세계에 보이는 일련의 변화는 타인에게로 향했다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환 구조를 보인다. 자신의 몸과 서사를 직접적으로 담던 시기를 지나 타인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리가 더욱 선명해지길 거듭한다. 예술이란 결국 타인의 삶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관객에게도, 작가에게도 해당된다. 가끔은 타인을 끌어안으려 시작한 일이 나를 끌어안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서로를, 자신을 끌어안으며 한 사람의 세계는 더욱 유연해진다.
그리하여 전작에는 드러나지 않던 새로운 갈래가 작품 안에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형식적 변화를 넘어 작가 스스로 삶을,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그의 다음을 상상해본다. 다큐멘터리나 구술사 채록의 형식을 계속해서 이용할 수도, 여성의 생애사에 더 천착하거나 신유물론적 관점에서 자연과 종교, 인간의 관계를 다룰 수도 있을 테다. 그가 제주의 레지던시로 작업 환경을 옮긴 만큼 제주 문화를 더욱 깊이 파고드는 작업이 이어질 지도 모른다.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그 앞에 놓여 있기에, 두 신작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장연호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 작품들이 그의 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작가 장연호와 인간 장연호는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직선이 아니라 나선으로 둥글게 상승한다. 삶도, 예술도 언제나 나선형으로 성장한다. 작가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바깥으로 확장했다가 타인의 삶을 경유하여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둥근 움직임을 반복한다. 시작점에 다시 돌아온 것 같지만 그곳은 예전에 혼자 세상을 바라보던 자리가 아니라, 성장의 주춧돌을 딛고 더 널리 조망할 수 있는 자리다. 스스로 나선형을 그리며 발전하는 작가의 세계는 이제 외부의 다른 존재들과 나란히 손을 맞잡는다. 모두 함께 손을 잡고 연대하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커다란 원이 탄생한다. 원의 중심은 비어 있다. 빈 자리는 다름 아닌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날 자리다.
김지연 (미술비평)
이 글은 전주문화재단 팔복예술공장 비평가매칭 프로그램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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